이재기 대한방사선방어학회 방사선안전문화연구소장.
이재기 대한방사선방어학회 방사선안전문화연구소장.

[이재기 대한방사선방어학회 방사선안전문화연구소장] 2월 임시국회가 29일에 종료됐다. 모처럼 발의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이끌 특별법률안이 소관 법안소위 문턱에 걸려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했다. 후속 임시국회가 불투명하기에 제21대 국회 종료로 법률안이 자동 폐기될 처지가 됐다.

우리나라 원전 27기가 2023년까지 내놓은 사용후핵연료(주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양은 이미 경수로 핵연료 집합체가 2만2502개, 크기가 작은 중수로 핵연료다발이 50만8892개에 이른다. 오래된 것은 40년이 넘었지만 처분장이 없어 계속 원전 부지에 임시저장 중이다. 매년 신규로 발생할 양도 경수로 집합체 800개, 중수로 다발 1만3000개 수준이다. 

고준위 폐기물에 함유된 여러 방사성핵종의 수명이 수만 년 또는 그 이상이어서 지상이나 근지표 시설에 처분은 그렇게 먼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가를 불문하고 지하 200m 이상 안정된 심지층에 처분장을 건설해 처분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심지층이면 모두 적합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아래서도 안전성을 높이려면 최적 부지를 찾아야 한다. 

이 부지 선정이 고준위 처분장 건설의 출발점이자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다.

첫째는 문헌조사를 통해 적절한 지층을 가질 것으로 보는 여러 지역을 선정하고, 현장조사를 통해 폐기물 안전성에 영향을 미칠 여러 인자의 특성을 평가해 몇몇 후보부지로 압축하는 일이다. 둘째는 후보부지 인근 주민 합의를 구해 부지를 확정하는 일이다.

주민 합의는 결국 주민투표로 결정될 전망이다. 투표가 중요 의사결정에 최선의 수단은 아닐 수 있지만 이해가 갈리는 사안에 대한 현실적 절차이기 때문이다. 위해가 월등히 낮은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에 수십 년간 우리 사회가 겪은 진통을 돌아볼 때, 고준위 폐기물처분장 부지 선정에는 훨씬 더한 갈등이 예상된다. 따라서 부지 선정 주체는 투표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주민의 이해를 도모할 다양하고 전략적인 프로그램을 수립, 이행해야 한다. 

최종 부지가 결정된 후에도 부지 상세특성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안전규제 당국의 인허가와 여러 당사자의 이해를 뒷받침할 처분시설 안전 논거를 확립하는 데에도 여러 해가 소요된다. 500m 정도를 굴착하고 처분 사일로를 건설할 기간도 만만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부지 선정 착수부터 처분시설을 완공해 고준위폐기물 처분을 개시할 때까지는 35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처분장 확보가 기약 없이 지연되면 ‘사용후핵연료를 보낼 곳이 없어 원전 운영을 중지해야 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보도에 따르면 특별법안에 대한 쟁점은 법률의 핵심규정이 아니라 일부 세부규정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사업추진 주체의 형태와 위상, 고준위 처분장 용량과 우리나라의 원전 운영 정책과 연계 문제, 처분장 완공 이전까지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 문제, 재원인 폐기물기금의 사용 범위 등이다. 원전 운영을 계속할 것인지 탈원전을 전제로 할 것인지와 같은 이슈는 정당의 정강과 연계되기 때문에 고준위폐기물 특별법에서 방향을 정하기 어렵다. 쟁점이 여럿인 이유는 제안된 특별법안이 한꺼번에 너무 넓은 범위까지 포괄적으로 규정하려한 탓이다. 

부지확보가 가장 시급하고 큰 어려움이 예상되는 부분이어서 10년이 걸릴 수도 있으므로 우선 특별법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을 위한 특별법’으로 범위를 좁히는 것이 입법 과정에서 쟁점을 줄여 숙명적 국가사업 출항시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단계인 처분장 건설과 운영은 굳이 특별법이 아니어도 방사성폐기물관리법과 원자력안전법을 보완해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특별법은 고준위 처분장 부지선정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추진할 주체와 그 절차를 설정하는 것이 좋겠다. 부지선정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주민합의라는 난제를 풀어가야 하는 일이므로 정책 심의기구인 원자력진흥위원회는 추진주체로 부적절하다. 집행력이 있는 독립된 행정위원회를 둘 수도 있겠지만, 원자력사업과 이해관계에 있지 않은 국토부나 환경부에 특별 조직을 설치할 수도 있겠다. 

후보부지 선정을 위해 타인 소유의 토지에서 시추 등 필요한 조사를 실시할 권한을 추진주체에 부여하는 것이 긴요하다. 소유주가 이를 거부하거나 방해하지 못하게 하되, 소유주가 입은 손해를 보상할 근거도 필요하다. 제21대 국회가 입법에 태만하면 제22대 국회는 높은 우선순위로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저작권자 © 에너지플랫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