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명예선임연구위원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명예선임연구위원

[에너지플랫폼뉴스 :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명예선임연구위원]세계 석유 수요의 둔화보다 빠른 속도의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 위축은 향후 국제 석유 시장의 구조적인 불안정을 야기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석유 수요의 증가율은 이미 1970년대 석유 위기 이후 낮아지기 시작했고,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각국의 에너지전환 정책이 추진되면서 더욱 더 낮아졌다.

예측 기관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석유 수요는 2030년대 어느 시점에 정점에 도달해 더 이상 증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문제는 석유기업들의 투자가 이보다 먼저 축소돼 둔화하는 석유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의 공급마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석유기업들의 투자를 위축시키는 대표적인 이유는 투자 자금을 제공하는 기관투자자와 투자은행 등 거대 투자자들의 탄소중립 투자 요구다.

부연하면, 투자자들은 석유기업들의 신규 석유 투자를 억제하고 석유기업들에게 기존의 석유 생산 및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일정 기간 내에 감축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재무적 성과만을 추구하는 투자보다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감안한 투자가 장기적으로 리스크를 줄인다고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미국의 3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뱅가드, SSGA(State Street Global Advisor)는 2020년 말 석유기업들에게 탄소 배출 저감과 에너지전환을 위한 대응책 마련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또한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공적 연기금인 뉴욕 연기금(New York Pension Fund)은 자신이 투자한 기업들의 화석에너지 사업 규모를 파악해 2025년까지 리스크가 큰 기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아가 2040년까지는 모든 투자 포트폴리오를 탄소중립 투자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뉴욕 연기금은 그동안 화석에너지 사업에 주로 투자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이 더욱 놀라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서방국의 러시아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 등으로 석유의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국제 유가는 급등했다.

이에 따라 화석에너지의 역할이 재조명되고 석유기업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탄소중립 투자 요구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오히려 유럽계 투자자들은 최근의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석유와 가스 등 화석에너지 투자에서 탈피해 재생에너지에 더 공격적으로 투자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프랑스의 투자은행 크레디 아그리콜(Crédit Agricole)은 지난해 12월 신규 석유개발 프로젝트에는 투자하지 않을 것이며, 기존의 석유개발 및 생산 투자는 2025년까지 25%를 삭감하겠다고 밝혔다.

영국의 HSBC도 신규 석유 프로젝트는 물론 신규 가스 프로젝트에도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크레디 아그리콜과 HSBC는 2030년까지 기존 석유·가스 투자에서의 탄소 배출을 각각 30%, 34% 감축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투자자들의 움직임은 메이저 국제석유회사(IOC)들과 독립계 석유회사들의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편, 투자자들의 요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중동의 국영석유회사(NOC)들은 최근의 에너지 위기에서 여전히 화석에너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에 고무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산량 조절을 통해 가격을 지탱하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주축을 이루는 중동 국가의 국영 석유회사들이 선제적으로 투자에 나설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가 2016년 ‘비전 2030’에서 천명한 것처럼, 중동 산유국들도 석유 의존적인 경제구조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결국, 석유기업들의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 위축은 석유 수요가 확실한 감소 추세를 보이기 전까지 유가에 상승 압력을 가하고 유가의 단기 변동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략적 목적의 석유 비축과 원유수입선 다변화 등 전통적인 공급 안정화 대책 그리고 높은 에너지 가격에 기인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관리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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