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석유 허브(HUB)인 싱가포르에서 거래되는 석유 가격은 국제 기준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석유 가격도 싱가포르 현물 흐름에 연동돼 결정되는 구조를 띄고 있다.

1990년대 후반의 석유 가격 자유화 조치 이후 정부는 국제 원유 가격을 반영한 ‘유가 연동제’를 시행했는데 운용 과정에서 기준 가격을 싱가포르 현물 석유 가격으로 바꿨다.

원재료인 원유보다 최종 산물인 석유제품 가격을 연동시키는 것이 석유 수급을 포함한 시장 상황을 보다 정확하고 투명하게 반영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0년대 들어서는 알뜰주유소 상표를 등록해 정부가 직접 석유 유통 사업에 진출했고 공기업을 동원해 무수익 영업을 펼치며 민간 시장 가격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석유 사업자들로부터 가격을 보고받는 등의 감시 장치도 마련했다.

정유사와 석유대리점, 주유소 단계의 석유 공급, 판매가격을 길게는 주간 단위, 짧게는 실시간으로 보고하도록 법정 의무화했고 오피넷 등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이렇게 수집된 가격은 휴대폰, 내비게이션, 인터넷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들에게 전달돼 석유 소비 선택에 활용되고 있다.

시민단체 등에 위탁해 석유 가격 모니터링 역할도 맡기고 있다.

그런데 이걸로도 모자랐는지 최근 정부는 각 정유사의 지역별 석유 판매 가격과 판매량 보고를 의무화하는 법안 개정을 입법 예고하며 또 다른 감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유사들은 현재도 석유사업법령에 근거해 석유 판매 가격을 주기적으로 정부에 보고하고 있는데 지역별, 판매처별 가격까지 세분화해서 보고받겠다고 나섰다.

지역별로 석유 가격 편차가 발생하고 있는데 정유사 가격 공개 범위를 세분화하면 경쟁이 촉진돼 그 차이가 좁혀지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부 판단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원유는 전량 수입되고 있으니 원유 가격 흐름을 대입하면 내수 석유 가격이 적정하게 결정되는지 손쉽게 판단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는 다양한 국적의 정제 기업과 무역 상사들이 진출해 석유 거래에 참여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형성되는 가격이 곧 ‘글로벌 경쟁의 결과물’이고 그 가격을 준용하는 우리나라의 석유 가격 역시 경쟁의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석유시장 워치독 역할을 하는 에너지석유시장감시단 분석에 따르면 9월 셋째 주 내수 휘발유 가격에서 세금은 38.58%, 국제휘발유 가격이 48.78%를 차지했다.

정부 몫인 세금, 정유사 생산 원가 개념인 국제 가격이 내수 휘발유값의 87.36%를 차지했고 그 나머지가 정유사, 주유소의 유통 비용과 마진인 셈이다.

같은 기간 경유 소비자 가격은 국고로 들어가는 세금이 30.01%, 국제 가격이 64.82% 등 94.83%의 비중을 차지했고 정유사, 주유소 유통 비용과 마진은 5.17%에 그쳤다.

감시단 분석대로라면 휘발유, 경유 소비자 가격중 정유사 정제 원가와 세금 비중이 90% 내외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어서 정유사나 주유소가 폭리를 취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볼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정부가 뜬금없이 정유사 가격 보고 범위를 확대해 경쟁을 촉진하겠다고 나선데는 기름값에 대한 소비자 불만을 전가시킬 ‘그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최근 들어 국제 원유 가격이 하향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도 그만큼의 내수 가격 인하로 이어지지 않는데 대한 정부의 초조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환율이 오르는데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원달러 환율은 이달 들어서만 1일 1,358.50원을 기록했던 것이 28일 현재 1,439.20원을 형성하며 5.9%가 올랐다.

환율만 감안하면 내수 석유 가격은 한 달 만에 6% 가까운 인상 요인이 발생했고 그만큼 기름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우리 정부는 국제유가나 싱가포르 석유 가격, 환율 그 어떤 것도 통제하거나 조정할 능력이 없으니 오롯이 소비자들이 감당해야 하는데 그 민망함을 감추려 애꿎은 정유사를 걸고 넘어 지려 하고 있다.

생산 제품 절반을 수출하며 무역 수지 개선에 기여하는 정유사를 소비자 불만의 타깃으로 내몰아서는 안되며 정유사 가격 공개 범위가 확대되면 지역 기름값이 내려갈 것이라는 어설픈 기대로 소비자 시선을 어지럽히거나 또 다른 규제로 시장 개입을 강화하려는 조치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세금 떼고 정제 원가 빼면 뻔한 유통비용과 마진을 겨냥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닦달하면 호주머니에서 뭐라도 내놓을 것처럼 호도하지 말고 해외 자원개발 정책에 손을 놓아 초고유가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데 대한 정부 스스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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