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차입경영에 파산직전까지

▲ 민영화 이전 연도별 경영적자 현황
-모럴해저드, 노조 투쟁에 기진맥진-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과(因果)가 분명하다.

공기업시절의 송유관공사는 분명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송유관공사가 설립된 1990년 당시의 사업계획에는 1993년까지 남북송유관을 포함한 전국송유관 건설 작업을 완료하고 전 구간 상업운전을 시작해 1996년부터는 흑자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송유관 건설과정에서 예기치 못했던 공기 연장과 시설 증설, 신규사업 추진 등 6차례에 걸친 사업 내용 변경이 이뤄지며 사업비는 당초 예상을 훌쩍 뛰어 넘었고 막대한 차입경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됐다.

당초 5665억원으로 책정됐던 송유관 총 사업비는 이보다 3294억원이나 증액된 8959억원이 투입됐다.

1997년 11월 불어 닥친 외환위기의 서슬 퍼런 시련은 이제 막 전국 관로 건설을 완료하고 운영을 시작하려는 송유관공사를 걷잡을 수 없는 위기로 빠뜨렸다.

극심한 환율변동으로 기름값은 치솟았고 석유소비는 크게 위축되면서 송유관공사의 관로수송물량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휘발유 소비자가격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0월 리터당 740원대에서 불과 몇 달 사이 4~500원 정도가 인상되며 극심한 소비감소로 이어지게 됐다.

그 결과 1998년의 석유소비는 전년에 비해 휘발유는 14.3%, 등유와 경유는 각각 27% 이상이 줄어 들었고 기름수송으로 먹고 사는 송유관공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실제로 송유관공사의 1998년 1월 하루 출하량은 계획 대비 57%수준에 불과한 2만700배럴에 그쳤다.

생존을 위해 회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저 비용을 줄이는 것 뿐이었고 1997년 523명에 달했던 정원은 1999년 6월 180명이 줄어든 343명으로 조정됐다.

추가 건설예정이던 성남-인천 구간 송유관과 경북 저유소 건설도 무기한 연기됐고 출자회사인 G&G텔레콤 보유지분과 서울 사당동의 구 사옥, 골프회원권 등 불요 자산 매각에도 나섰다.

1999년 대주주인 정부가 나서 ‘테이크 오어 페이(Take or Pay)방식’의 장기수송계약을 마련하면서 다행히 송유관공사는 운영 효율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조성되며 한 숨을 돌리게 됐다.

‘테이크 오어 페이(Take or Pay) 방식’은 화주인 정유사들이 일정 물량을 의무적으로 수송토록 하고 대신 초과 수송물량에 대해서는 할인혜택을 제공해 송유관공사가 최소한의 안정적인 운영기반을 마련하는 기회가 제공됐다.

하지만 과다한 차입금과 방만한 경영,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와 사기 저하, 극심한 노조투쟁은 대주주인 정부와 주주이자 화주인 정유업계의 다양한 지원노력에도 회생의 가능성을 더욱 어둡게 몰고 갔다.

2000년 6월 회사의 노조는 고용불안 해소 등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에 나섰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금융비용은 회사의 목을 졸라 왔다.

민영화를 목전에 두고 경영진과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는 더욱 심각해져 당시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노조측과 ‘민영화 이후 완전한 고용보장과 퇴사자에게 공로퇴직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의 신규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됐다.
 기업의 주인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뒤바뀔 운명의 회사에서 새로운 주인의 동의도 없이 전 주인의 대리인이 한 턱 쓰듯 허용한 단체 협약은 민영화 초대 전문경영인으로 취임한 조헌제 호(號)의 발목을 두고 두고 옭아매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2250억원에 불과했던 회사 자본금을 크게 초과한 사업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송유관공사의 숨통을 죄어 왔다.

전국 송유관이 본격 가동된 첫해 회사는 60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이중 437억원을 이자비용으로 지출해야만 했다.

가정(家庭)으로 치면 빌린 돈의 원금은 고사하고 가장(家長)이 벌어 오는 돈의 73% 정도를 이자로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제대로 살림이 될 리가 만무했다.

민영화 직전인 2000년에는 총 납입자본인 2250억원중 70%인 1580억원이 잠식된 상태였고 차입금 규모는 6783억원으로 자본대비 부채비율이 341%에 달했다.

당시 회사는 721억원의 매출에 173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순 금융비용이 419억원에 달해 사실상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통해서는 금융비융도 감당하지 못하는 부도직전의 상태였다.

민영화를 앞두고 회사 노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농성과 파업에 나서면서 정상적인 업무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1998년 송유관공사의 민영화 방침이 결정된 이후 벌어진 집회나 불법파업행위는 무려 18회에 달했고 동원하는 수단도 극단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총이 열리는 것을 제지하거나 임원실을 무단 점거하고 정상조업을 방해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특히 1998년 7월 송유관공사가 한국송유관(주)를 흡수 합병하는 것을 계기로 한 회사내에 두개 노조가 활동하는 기형적인 투쟁노선이 형성됐고 회사측과의 갈등의 여지는 그만큼 많아 지게 됐다.

민주노총에 가입한 송유관공사 노조와 한국노총 소속인 한국송유관 노조는 민영화 이후에도 상당기간 양분된 모습으로 유지되며 회사와 긴장관계를 유지했고 경영층에게는 두개 노조 모두를 설득시키며 끌어 안고 가야 하는 수고가 더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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