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관리원, ‘철저한 재고관리’vs 주유소, ‘현실적으로 불가’ 대립
겨울철용 경유 공급기간 늘어나면 막대한 생산비용 발생
정유사, 전표 스펙 표기·잔존물량 회수 요구는 불가 방침

[지앤이타임즈 박병인 기자] 석유사업자들은 1년 내내 석유사업법이 규정한 제품 스펙 맞추기와 한판 씨름을 벌여야 한다.

석유사업법에 따르면 휘발유 유증기압은 동절기(10월~4월) 기준은 44~96kPa, 변절기(5월~6월) 기준은44~82kPa, 하절기(7월~8월) 기준은 44~60kPa다.

여름이 지나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겨울철에는 경유 유동점 기준을 맞춰야 한다.

경유 유동점 기준은 혹한기(12월~2월)는 23도, 동절기(11월 한달, 3월 1일~15일)에는 18도, 3월 16일부터 3월 31일까지는 13도다.

만약 이를 위반할 시 ‘품질관리 부적합’으로 1회 위반 시 경고조치, 2회 위반 시에는 3개월 영업정지, 3회 위반 시에는 6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는다.

휘발유 유증기압, 경유 유동점 위반 모두 1회 위반은 경고에 그치지만 2회 위반부터 영업정지라는 중징계가 내려진다.

영업이 중단되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는 주유소, 판매소 등 소매업자에게 유증기압과 유동점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휘발유 유증기압, 경유 유동점 모두 자동차 시동 꺼짐 등 차량에 경미한 문제를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 석유관리원-주유소·판매소, 재고관리 문제 두고 평행선 대립

석유관리원은 석유사업자들에게 품질기준을 위반하지 않으려면 철저한 재고관리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석유관리원의 주장은 석유사업법으로 유증기압, 유동점 기준이 정해져 있는 이상 단속을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주유소, 판매소사업자들은 석유관리원이 언급한 철저한 재고관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항변한다.

유증기압, 유동점 모두 스펙이 서로 다른 제품을 섞더라도 중간치로 희석되지 않기 때문에 저장탱크에 있는 기존 물량을 모두 소진해야 기준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주유소의 경우에는 위치에 따라 유종별 물량 회전율이 달라진다. 승용차가 많이 다니는 도심지역의 주유소들은 휘발유 회전율은 빠른 편이지만, 반대로 경유의 회전율은 느린 경우가 많다.

반대로 외곽지역에 위치한 주유소들은 화물차, 공사장이 많아 경유 판매량은 많지만 휘발유 판매량은 적다.

일반판매소는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일반판매소의 업황이 좋지 않아 지역을 불문하고 재고 회전자체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두 업계 모두 포화상태로 인해 치열한 가격경쟁에 내몰려있는 상황이다. 정유사 출고 가격이 저렴할 때 물량을 비축해둬야 대형 석유사업자들과 가격경쟁이 된다.

또한 석유시장의 특징상 소량주문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 판매량을 감안해 제품을 입고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석유관리원이 주장하는 ‘철저한 재고관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두 업계의 주장이다.
계절이 바뀌어 더 이상 판매할 수 없게 된 잔존물량에 대한 해결책도 두 업계는 요구하고 있다. 설령 판매를 하지 않더라도 탱크에 있는 물량을 제거해야 새로운 스펙의 석유제품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유증기압 위반으로 경고조치를 받은 한 주유소사업자는 “석유관리원은 기준이 지난 물량이 남아있으면 판매를 하지 말라는데, 남아있는 재고를 버릴 수도 없고 답답한 심정”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 겨울철용 경유 공급시작 15일 더 앞당겨 달라…정유사는 생산비용 증가에 난색

산업부는 지난달 22일 서울 석탄회관에서 ‘품질기준 제도개선 가능여부 검토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산업부, 석유관리원, 정유4사, 석유유통협회, 주유소협회, 석유일반판매소협회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 지난달 22일 산업부 주관으로 석탄회관에서 개최된 석유사업자 회의에서 각 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이번 회의는 한 국민이 ‘정유사들의 동절기용 경유 공급시기를 앞당겨 달라’는 건의사항을 국민신문고에 접수하면서 열렸다.

석유사업법에는 동절기 기준 적용 시점(11월 1일) 15일 전부터 각 정유사들이 동절기용 경유를 공급을 개시하도록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이 15일이라는 기간이 지나치게 짧기 때문에 주유소, 판매소들이 재고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30일로 늘려달라는 것이 건의사항의 주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정유사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기존 15일에서 30일로 앞당길 시 막대한 추가 생산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생산비용이 증가하면 그만큼 소비자 가격에 반영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소비자 불만야기, 대외 이미지 악화 등 시장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또한 개인사업자의 수요예측실패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생산자가 다 떠안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는 산업부가 정유업계, 주유업계 양측의 의견을 듣고 다음 회의에서 재논의 할 예정이다.

산업부는 주유소업계에는 15일의 유예기간을 두는 데도 재고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에 대해, 정유사에게는 동절기용 경유공급 시점을 15일 더 앞당길 경우 발생하는 생산증가비용에 대한 내용을 제출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책임소재 불분명한 석유스펙 기준 위반, 해결책은 제도개선?

이날 회의에서 각 업계들은 스펙 기준 위반의 책임소재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다.

석유업계에서 소매를 담당하는 주유소, 판매소업계는 자신들이 공급받는 석유제품이 적합 스펙을 가진 물량인지 확실치 않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정유사들의 입장은 정유사 출고 제품들도 석유관리원의 관리를 받는데다 정해진 시기에 변경된 스펙의 물량이 나가기 때문에 기준에 어긋나는 제품이 출하될 리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오히려 정유사들은 대리점 단계에서 제품끼리 뒤섞이면서 기준위반 제품이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석유대리점업계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석유대리점들은 정유사에서 석유를 공급받으면 저장탱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주유소‧판매소로 납품하는 형태로 유통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석유대리점들이 대용량 저장탱크를 임대하거나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관련 법이 정한 석유대리점 요건을 맞추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활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는 것이 석유대리점업계의 주장이다.

즉 정유사들이 주장한 대리점단계에서의 서로 다른 스펙의 석유혼합 현상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유소‧판매소업계가 주장해왔던 출하전표 상 석유제품 스펙 표기 문제, 기준이 지난 물량 회수문제에 대해 정유사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미 정유사들은 직접 공급하는 주유소에 한해서는 이미 출하전표에 경유 유동점 등 스펙을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대리점을 거치는 경우에는 석유제품이 섞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품질을 더 이상 보증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출하전표 상 스펙 표기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비슷한 이유로 기준에 어긋나는 잔존물량의 회수문제에 대해서도 정유사들은 반대의견을 표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유소들이 음성적으로 혼합판매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정유사들이 제품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이외에도 운송비용 발생문제, 회수물량 보관문제 등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각 업계는 고의성이 없는 단순 재고관리 실패에서 비롯된 기준 스펙 위반이 과연 ‘품질기준 위반’이라고 적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다.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석유유통구조 개선에서 해결책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석유사업법 개정이나 석유관리원의 단속방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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