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다른 경유 섞어도 유동점 희석 안돼…재고순환만이 해결책
판매‧주유업계, ‘재고물량 정유사 회수’ 주장…운송비용 등은 문제
오는 22일 경유관리제도 개선 논의…업계의견 반영여부 주목

▲ 석유관리원 관계자들이 가짜경유 단속을 위해 시료를 채취하고 있는 모습(사진은 본 기사와 무관함).

[지앤이타임즈 박병인 기자] 하절기가 지나 유증기압의 악몽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듯 했던 석유사업자들은 이제부터는 경유유동점 집중관리 시즌인 동절기에 접어들며 다시 긴장모드에 돌입해야한다.

석유사업법에 따르면 12월 1일부터 다음해 2월 28일까지는 혹한기로 분류돼 경유유동점을 23도로 조절해야한다. 11월 한달과 3월 1일부터 15일까지는 18도, 3월 16일부터 3월 31일까지는 13도다.

만약 취급하는 경유의 유동점이 석유사업법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품질부적합’이라는 죄목으로 1회는 경고, 2회는 영업정지 3개월, 3회는 영업정지 6개월의 처분을 받는다.

또한 주유소의 경우 최대 3000만원, 일반판매소의 경우 최대 1000만원의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경유유동점 단속은 대부분 영세한 주유소나 판매소가 당한다. 판매량이 많은 대형 주유소, 판매소는 재고 회전율이 좋기 때문에 유동점 기준이 바뀌면 기존물량을 소진하고, 새로운 물량을 다시 입고하면 되지만 회전율이 좋지 않은 영세한 사업자들은 남은 재고를 처리하기가 곤란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석유업계에서 ‘소매업’을 담당하고 있는 주유소, 판매소업계는 소매자 단속위주의 품질관리보다는 공급자단계인 정유사 등을 중심으로 근본적인 유통구조를 개선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영세 주유소, 판매소 사업자들, 실질적으로 재고관리 어려워

현재 석유사업자들이 경유유동점 단속에 걸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철저한 재고 관리 뿐이다.

하지만 영세한 주유소, 일반판매소들은 재고관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볼멘소리를 낸다.

‘약육강식’의 원칙이 적용되는 석유업계의 가격경쟁에서 약자입장인 중소 주유소사업자들은 재고관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중소 주유소‧판매소 사업자들은 출고 가격이 저렴할 때 재고를 많이 비축해둬야 재고 회전율이 좋은 대형주유소들과 그나마 가격경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전율이 워낙 좋지 않다보니 잔존물량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잔존물량이 있는 상태에서 유동점 기준이 바뀌면 속수무책으로 단속될 수밖에 없다.

경유유동점은 스펙이 다른 두 경유가 섞인다고 해서 중간치로 희석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경유재고를 모두 소진하고 새로운 스펙의 경유를 채워 넣어야 기준에 맞출 수 있다.

또한 경유유동점은 동절기 기준 중에서도 혹한기(12월~2월)를 따로 구분해 더욱 강화된 기준을 적용하니 영세 사업자들은 그야말로 이중고를 겪게 된다.

실제로 동절기 경유유동점 단속은 이미 주유소사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꾸준히 단속되는 사업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고의성 없이 단순 재고관리에 실패한 ‘선의의 위반자’들이 대부분이다.

석유관리원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경유유동점 기준 미준수로 적발된 석유사업장은 2015년 20업소, 2016년 32업소, 올해는 지난달기준 25개 업소다.

기준위반 경유가 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석유관리원과 석유사업자들 간의 온도차가 있다. 석유관리원은 경유 유동점 위반 시 차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최악의 경우 엔진공급계통을 전부 수리해야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석유사업자들은 경유유동점이 시동꺼짐 등 경미한 부작용은 일으킬 수 있지만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 급변하는 유동점 기준에 괴로운 주유소·판매소, 해결의 열쇠는 정유사?

영업, 수익, 직원임금 등 다양한 문제를 신경 쓰기에도 바쁜 주유소사업자들에게는 석유사업법이 요구하는 ‘재고 스펙맞추기’는 고역과도 같은 일이다.

경유유동점 단속에 대한 석유사업자들의 불만 가득 찬 목소리는 매해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반복되고 있다.

주유소업계의 경우 석유관리원의 ‘표적단속’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 석유관리원으로 이관된 거래상황기록부 자료를 악용해 물량회전율이 낮은 주유소나 입고실적이 없는 주유소를 노려 단속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유소업계의 주장에 대해 석유관리원은 ‘단속대상 무작위 선정 원칙’을 여러 차례 주장하며 부인한 바 있다.

일반판매소업계의 경우에는 출하전표에 유동점 등 관련 스펙을 표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유사에서 제품이 출고될 시 출하전표라는 것을 발행하는데, 출하전표에는 적재량, 판매금액 등만 표기될 뿐 출고되는 제품의 유증기압, 유동점 같은 스펙은 표기되지 않는다. 이는 4대 정유사 모두 공통이다.

정유사에서 출고되는 제품의 스펙을 확인할 길이 없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이 일반판매소업계의 주장이다. 출하전표에 제품스펙을 정확히 표기해 중간단계인 대리점에 인계하고, 대리점은 출하전표를 바탕으로 다시 일반판매소로 유통하면 책임소재가 명확해진다는 의견이다.

특히 두 업계는 기간 내 미처 다 판매하지 못하고 남은 잔존 경유물량을 처리할 수 있는 방안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가장 최고의 방안은 기준에 맞지 않게 된 잔존물량을 정유사가 다시 회수해 가는 것이다.

물론 정유사 입장에서도 회수물량의 보관문제나 수송비용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주유소‧판매소업계의 요구에 대해 정유사들은 아직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다.

결국 경유 유동점 관련 석유업계 간 분쟁해결의 ‘열쇠’는 어쩌면 정유사가 쥐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다.

◆ 산업부, 오는 22일 경유유동점 관련 회의…석유사업자 불만사항 반영될까

산업부는 석유관리원과 함께 오는 22일, 업계 관계자들을 모아 경유유동점 관련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석유관리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회의는 한 익명의 네티즌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혹한기경유관리 제도개선을 건의했고, 이에 산업부 주관으로 업계의 의견을 듣는 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회의에서는 네티즌의 건의사항에 대한 논의 뿐 만 아니라 업계의 건의사항도 청취할 가능성이 높다. 정유사, 주유소, 석유대리점, 일반판매소 등 국내 석유유통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업계가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유소, 판매소 업계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해결책인 ‘판매업자 위주의 단속보다는 공급자 중심의 근본적인 유통구조개선’을 산업부가 받아들여 줄지는 미지수다.

과거에도 두 업계는 산업부에 경유유동점 단속이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문제제기 하며 해결책을 요구한 적이 있지만, 현재까지도 제도개선이 이뤄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석유일반판매소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항상 주유소, 판매소 등 소매업자에게만 품질관리 책임을 묻는데, 사실 석유소매업자들은 품질을 철저히 관리할 수 있는 여력이 전혀 되지 않는다”며 “품질관리는 정유사, 대리점 등 공급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출하전표 유동점표기 등 품질보증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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