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 편집국장.
정부가 주유소 사업에 나섰다.

‘알뜰주유소’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자가상표 주유소와 도로공사 소유 고속도로 주유소, 농협 주유소 등을 대상으로 보급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들 주유소에 공급할 석유는 에너지 공기업인 석유공사가 정유사를 상대로 입찰에 부쳐 경쟁력 있는 가격을 형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2015년까지 전체 주유소의 10%를 알뜰주유소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알뜰주유소 보급 사업에 나선 배경은 시장 경쟁을 유도시켜 기름값을 낮추겠다는 취지다.

정유사 영업이익률이 4%에 불과하고 소매 단계인 주유소 역시 매출액 이익률은 소비자 가격중 1.5%에 해당되는 카드 수수료를 제외하면 2~3% 수준에 불과한 상황인 점을 감안할 때 알뜰주유소의 등장으로 기름값이 얼마나 낮춰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가 민간 시장에 진출해 사적 재화를 유통하고 가격 결정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이 전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이번 알뜰주유소 로드맵은 거창하고 짜임새 있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정부의 공권력을 활용한 시장의 무임승차 시도에 불과하다.

석유공사라는 에너지 공기업은 구리와 동해, 평택, 여수, 곡성, 서산 등 전국 9곳에 1억4600만 배럴의 비축석유제품을 담을 수 있는 저장시설을 확보하고 있다.

물론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것이며 본래의 사용 목적은 에너지 쇼트에 대비한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는 공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다른 에너지 사업자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저장시설을 건설하고 비축의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반해 석유공사는 공적 비축시설을 상업적 용도로 전환만 하면 된다.

석유공사는 석유 유통 사업 경험이 없다.

정유사나 외국 정유사를 상대로 바잉파워를 행사할 만한 소매 유통 네트워크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공기업인 도로공사 주유소나 정부의 지배와 관리를 받는 농협중앙회의 바잉파워에 편승해 석유 프랜차이즈 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영세 석유수입사들이 정유사의 경쟁력에 밀려 안정적 석유 공급 루트인 주유소를 확보하는데 번번히 실패하고 있는데 석유공사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수백여 곳의 수직계열화된 주유소를 단숨에 확보하고 바잉파워를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주유소협회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0여 곳이 넘는 석유수입사가 활동중이지만 정작 석유수입사의 상표를 도입한 주유소는 단 한 곳도 없다.

석유산업 자유화가 이뤄진 지난 1997년 이후 10여년이 지났지만 석유수입사의 위상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데 정부가 도로공사와 농협중앙회를 압박하자 석유공사는 엄청난 바잉파워와 소매 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간 정부가 정유사와 경쟁 구도를 형성하겠다면 민간 석유수입사의 경쟁력 강화방안을 추진해 왔는데 이제는 석유공사의 등장으로 석유 수입사들이 도산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정부는 알뜰주유소 보급 확대를 위해 국민 세금도 지원한다.

시설개선과 석유 품질 보증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그 수혜를 입는 주유소는 한정되어 있다.

그간 정유사와 석유대리점, 주유소들이 정부를 대신한 고율의 유류세 징수 창구가 되어 국가 재정 건전화에 앞장서 왔고 경영 활동의 결과물로 막대한 조세 의무를 수행해 왔는데 그 자금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알뜰주유소 사업 재원을 투입하는 것을 보면서 큰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유류세 인하 요구에 귀를 닫은 정부는 정작 자신들의 재정 손실은 감수하려 하지 않고 국민의 세금과 공권력을 앞세워 석유유통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석유공사를 한 순간에 국내 최대 석유 마케팅기업으로 변신시키려 하니 봉이 김선달 놀음과 다를 바가 없다.

정부 스스로가 강조하는 공정거래를 스스로 위반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석유공사가 정유사를 상대로 공동구매한 제품은 최소한의 마진만 남긴 채 알뜰주유소에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수익 극대화가 생존 목표인 민간 기업들은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기름값을 낮추는 것이 미션인 석유공사와 애초부터 경쟁상대가 될 수 없으니 공정하지 못하다.

정부는 알뜰주유소에 싼 기름을 공급하는 대신 그 만큼 낮은 가격대로 소비자에게 팔라고 주문하겠다는 입장인데 공정거래법에서 금지하는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 등에 해당될 수 있다.

정부라는 브랜드와 공권력만으로 하루 아침에 국내 최대 석유 마케팅 기업을 세우는 능력도 놀랍지만 국민이 주인인 정부가 바로 그 국민과 시장에서 경쟁하겠다는 발상에는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이래서 석유 시장을 평정하게 되면 정부는 알뜰 중국요리, 알뜰 정육점 등 생활 물가를 낮추기 위한 또 다른 알뜰 브랜드 사업에 나서도 되겠다.

정부가 사적 재화인 기름 시장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스스로 장치산업인 정제업에 진출해 생산 원가나 유통 비용이 얼마인지 검증하고 민간 정유사와 경쟁하거나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가격대의 석유를 확보하려는 노력이라도 기울이는 것이 정정당당한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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