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 시비 불구 원가 공개·대중소 상생 무시
수입 석유에 인센티브, 국영 주유소 건설도 추진

▲ 통영에 위치한 이마트 주유소. 주유소간 경쟁을 촉진시키겠다며 정부는 마트주유소 확대방안을 추진중이다.

‘기름값이 묘하다’

연초 국민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한 이명박 대통령이 던진 이 한마디로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유관 정부 부처에 비상이 걸렸다.

대형 할인 마트의 주유소 진출을 확대시키고 자가 상표 주유소를 늘리는데 정부가 개입해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는가 하면 석유시장 감시 기능을 추가로 강화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지식경제부 최중경 장관은 국내 정유사의 석유 생산 원가를 직접 계산해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열린 모 회의에서 ‘우리나라에는 왜 대형 석유 수입사가 없느냐’고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직후 지식경제부는 석유공사를 통해 석유를 수입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부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다양한 석유 시장 경쟁 촉진 방안을 내놓고 있고 정유사를 비롯한 석유업계가 벌벌 떨고 있다.

정유사들은 지난 4월 이후 3개월간 수천억원대의 영업이익을 포기하면서 까지 기름값을 리터당 100원씩 낮춰 판매했고 주유소 업계는 정부가 대안주유소 육성, 마트주유소 확대 방안을 발표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실용 정부 출범 4년 동안 끊임없이 추진된 석유 유통 투명화와 경쟁 촉진 방안이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부 스스로도 회의적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석유 시장 경쟁 촉진 방안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 정권 출범 초기부터 석유 물가 잡기에 올인

실용정부가 석유 물가 안정화에 올인한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008년 3월 5일 열린 ‘제1차 서민생활 안정 T/F 회의’에서 기름값을 낮추기 위한 석유유통구조 개선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실용정부 출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는 여전히 석유 시장 경쟁 체제 도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경쟁 시스템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기름값이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간 석유유통시장 경쟁 촉진 수단으로 제시된 내용들이 때로는 반시장적이라는 또 때로는 위헌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파격적이었는데 기름값을 낮추기 위해 정부가 제안하는 경쟁 촉진 방안의 위험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현 정권 출범 이후 정부는 영업기밀 누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유사의 석유 공급 가격 공개를 강제화했고 정부 스스로가 대중소 상생협력을 강조하는 한편에서 대형할인마트를 앞세워 영세 주유소 시장에 진출시키는 강수를 뒀다.

유사석유가 범람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위협받으면서 지난 1992년 제정한 주유소 상표표시 관련 고시를 과감하게 폐기했고 무자료 거래나 석유 부정 유통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수평거래 금지 조항도 허용시켰다.

내수 장치 산업을 보호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도 포기했다.

정유사와 경쟁시키겠다며 원재료와 완제품간 관세율을 차등하는 경사관세 제도도 포기하며 원유와 석유간 동일한 관세율을 적용중이다.

심지어 석유 수입사의 시장 진입 요건을 대폭 완화시켜 저장시설과 비축 확보 의무도 크게 낮췄다.

◆ 석유산업 폭리 증거 찾는데 ‘실패’

욕심이 앞서다 보니 석유산업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정부 스스로가 자충수를 둔 것도 여러 차례다.

정부 차원에서 주도하던 석유물가 관리를 시민단체에게 넘기겠다는 취지로 소비자시민모임 산하에 석유시장감시단을 만들고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는데 지난 해 이 감시단은 국내 정유사의 가격경쟁력이 우위에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단체가 지난 해 5월 발표한 리포트에 따르면 국산 휘발유 즉 국내 정유사들이 생산하는 휘발유는 수입 휘발유 대비 과거 4년간 리터당 평균 30~40원 정도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 원인도 정유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 또는 규제 환경 때문이 아니며 정유산업의 설비 경쟁력과 대규모 양산 능력 때문으로 분석했다.

정유산업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결론을 기대했던 정부로서는 뒷통수를 맞은 격이 된 셈이다.

올해 초 정부 주도로 구성된 ‘석유가격 태스크포스’의 논의 결과도 정부 입장에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시민단체, 학계, 연구계 등의 전문가들이 총 망라된 가운데 석유시장 투명성 제고와 경쟁촉진 방안이 논의됐는데 오히려 정유산업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유사 가격 결정 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지 여부와 석유 비대칭성 여부 등을 분석한 결과 특이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국제유가가 오를 때는 내수 석유 가격을 재빨리 올리고 유가가 떨어질 때는 석유가격이 천천히 내린다는 이른 바 석유가격 비대칭성 여부를 조사했고 일부 증거를 확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T/F는 정유사의 담합이나 폭리를 입증하지는 못했다.

당시 분석을 담당했던 한양대 윤원철 교수는 “분석 기간 동안 정유사와 주유소 단계에서 비대칭성이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비대칭성이 나타나는 사례가 상당수 확인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 정유사들보다 더 경쟁적인 일본 석유 가격의 비대칭성이 더 강하고 해외의 경우 매우 경쟁적인 시장에서도 비대칭성은 나타날 수 있고 반대로 대칭성이 발견된다고 정유사의 과대이윤 혹은 담합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해 비대칭성이 곧 정유사의 폭리로 연결된다는 세간의 의혹을 오히려 해소시키는 결과가 도출됐다.

정유사와 주유소가 폭리를 취하는 악덕기업이라는 증거를 찾아내 심판대에 세우겠다는 계획이 번번히 무산되고 있는 셈이다.

◆ 석유 물가 잡으면 정권 재창출?

사정이 이런데도 좀처럼 정부가 기대하는 석유 물가 안정화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부처의 몸이 달기 시작했고 올해 들어서는 보다 강경한 대책들이 제시되고 있다.

정유사에게는 한 해 내수 판매량의 40일분에 해당되는 비축을 의무화하고 있는 정부가 석유수입사의 비축 의무를 아예 폐지하는 것을 추진중이다.

정부와 더불어 에너지 안보를 지키기 위해 민간기업에도 강제화하고 있는 비축의무를 정유사를 견제하겠다며 석유수입사는 면제시키려는 것인데 원칙이 실종됐고 형평성이 위배된다는 지적을 사고 있다.

정유업계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기환경 개선을 명분으로 수송연료에 대한 환경품질기준을 강화하고 분석 결과 공개를 강행했던 정부는 이번에는 석유 수입의 장벽이 된다는 이유로 환경 품질 기준 완화를 검토중이다.

영업기밀을 유출시킬 수 있다는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각 정유사가 석유유통 사업자별로 공급하는 가격을 공개시키는 것도 강제화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다.

정유사에 대한 주유소의 선택권을 높이겠다며 혼합 판매 활성화 방안 연구를 추진중인데 정유사 브랜드 자산인 상표권 침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위헌 논란이 일고 있다.

정유사 상표를 달고 있는 주유소에서 경쟁 정유사 제품이나 혼합 석유제품을 자유롭게 판매하는 것이 기본적인 컨셉인데 그 과정에서 판매 제품에 대한 정보가 소비자에게 제공되지 않아도 되는 방향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비자들은 A 정유사 상표를 단 주유소에 들어가서도 어떤 경로로 공급된 제품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기름을 주유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한술 더 떠 국영 에너지 기업인 석유공사를 앞장세워 석유 수입업에 진출시키고 정부는 국공유지 등을 활용해 부지와 판촉 등에서 거품을 뺀 일명 대안주유소를 육성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지난 해 말 기준 석유공사의 총 부채는 12조3436억원인데 이중 차입금만 9조 7722억원 규모에 달한다.

하루 원유 생산량을 30만 배럴 이상 확보해 자원개발 메이저 기업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경쟁성 확보도 불투명한 석유 수입업에 석유공사를 앞장세우겠다는 발상의 비현실성이 벌써부터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더구나 전체 주유소중 10% 수준까지 끌어 올리겠다고 밝힌 대안주유소는 최소한의 수익을 정부 예산으로 보존해주겠다는 입장인데 시장 기능에 충실하게 작동하는 주유소 시장에 정부가 우회적으로 진출해 국민의 세금으로 주유소를 지원하는 것이 시장 경제에 적합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한 전문가는 “정부 스스로도 석유 유통 시장 경쟁을 더 이상 촉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물가를 안정시키지 못하면 정권 재 창출에 나설 수 없다는 대통령과 현 정권 실세들의 요구에 반시장적인 위험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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