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고치거나 만드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법 개정의 명분과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명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법률 소비자의 이해관계를 따져 보고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최근 벌어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과 관련한 장관 고시가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국민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려는 정부는 한 - 미 FTA 비준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한 - 미 FTA가 발효되기 위해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을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광우병 위험 인자에 노출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려는 것은 국민 건강을 담보로 삼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시장의 반응이다.

정부가 당초 일정을 늦춰 가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결정하는 장관 고시를 연기한 것은 바로 법률의 소비자, 또 시장이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거나 개정할 때 이른 바 ‘입법예고(立法豫告)’라는 절차를 거치는 것은 법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법률 소비자와 시장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각설하고 최근 지식경제부가 입법예고한 석유사업법령 개정 작업의 진행과정이 어쩐지 찜찜하다.

이번 석유사업법령 개정안에는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다.

석유 유통 시장의 경쟁을 촉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석유사업자간의 거래를 허용하는 내용은 물론 석유수출입 규제 완화 정책, 석유품질관리원 법정단체 방안, 유사석유의 효과적 차단 기법 등이 담겨져 있다.

중요한 정책이니 만큼 다양한 법률 소비자들, 즉 정유사나 주유소, 석유수입사의 생각이 다를 것이고 심지어 고유가를 견디지 못해 유사석유를 사용하는 일반 운전자들도 나름의 의견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식경제부는 일정한 입법예고 기간을 설정하고 법률 개정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기로 했는데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

이 법안의 입법예고 기간은 분명 5월 22일까지인데 같은 날 지식경제부는 ‘자체 규제 개혁위원회’를 열어 석유사업법령 개정안을 심사했다.

‘자체규제개혁위원회’라고 하더라도 이 곳에서 의결된 내용은 법률 개정안 내용의 첨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 만큼 의미가 크다.

그렇다면 입법예고의 취지를 살려 법률 소비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기다린 이후 규제심사 전문위원들에게 시장에서 제기된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고 참고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해야 할텐데 지식경제부는 의견 접수 기한이 종료되기도 전에 규제심사 작업을 벌이고 있다.

시장의 입장이나 법률 소비자들의 의견이 필요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입법예고라는 것이 형식적인 통과의례에 불과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만 관철시키면 된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쇠고기 협상과 관련한 장관 고시에 법률 소비자들이 의견을 낼 수 없거나 무시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는가?

석유사업법을 개정하는데 다양한 시장 참여자들의 견해가 충실하게 반영되지 못하고 참여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정책이 실패했을 경우 정부는 뭐라 변명할 수 있겠는가?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가 고민한 흔적들이 서둘러 정책에 반영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장 참여자의 목소리에 인내심을 갖고 고민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일방적인 것은 언제나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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